특정한 시기에 특수한 용도와 형식으로 지어진 건축물이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에 영향을 받으며 시간에 따라 점차 변하고 진화했지만 본래의 구조적 특징과 기억은 완전히 퇴화되지 않고 어딘가에 아직 남아, 한 몸체에 과거부터 현재까지의 부분부분들이 공존하는 ‘집’을 향한 나의 여정이기도 하다. 산비탈에 피란민들이 임시로 거주할 공간을 만들면서 생겨난 좁고 구불구불한 미로와 같은 아미동과 우암동의 길을 어린 시절 보물 찾기를 하듯 걸어 다니며 역사의 흔적들을 발견하였다. 그 길 위에 나의 시간을 조금씩 쌓아가면서 바라본 두 마을은 매스컴을 통해 주로 집중되어 보여지는 ‘죽음’이나 ‘귀신’, ‘수탈’에만 머물지 않고 있었다. 자극적인 이미지와 이야기들 그 이면에는, 노후되고 사람이 살지 않는 빈집들이 많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회색빛의 풍경이 아닌 여전히 숨을 쉬고 있는, 그리고 살아 움직이는 장소였다. 한 시대를 상징하는 과거의 그림자 옆으로 햇볕도 함께 비추고 있는 장소였다. 그동안 많은 건축물과 집을 보아왔지만, 이토록 빛나는 삶의 의지를 드러내는 ‘집’은 처음이었다.
건축은 그것이 지어진 지역과 시대적 상황, 정치, 문화, 그리고 그 공간에 거주하는 사람의 시간과 고스란히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건축은 어떠한 객체처럼 멈춰있는 것이 아니라, 유기체처럼 끊임없이 자라고 변화하며 진화한다. 아미동 비석마을과 우암동 소막마을의 집들은 자신의 몸에 한국 근현대사의 격변기 속에서 변화하는 모든 과정을 그대로 지니고 있어, 마치 확대경을 들고 ‘집’이 지닌 역사의 레이어를 시간대별로 들여다보고 있는듯하다. 이 공간이 간직하고 있는 시간의 레이어처럼, 나의 작업은 한 화면 위에 두 마을의 서로 다른 시간대와 장소들이 녹아내리고, 뒤섞이고, 중첩되어 만들어진다. 과거의 흔적들이 집의 몸에 남아있듯, 드로잉에서도 녹지 않고 또 사라지지 않은 부분들이 남아있어 이전의 시간과 이야기들을 불러오게끔 한다. <제3의 공간: 끝의 시작>은 나 자신이 이방인이자 관찰자로서 아미동과 우암동을 바라보고 서술자로서 만들어 낸 제3의 공간이자 또 다른 세계이다. 두 마을의 집들이 지닌 이야기가 마음에 더욱 깊게 다가왔던 것은 버려진 일본식 가옥들 틈에서 자란 피란민 3세로서의 내 개인의 역사와 정체성과의 연결점이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의 몸 어딘가에도 그 역사가 완전히 퇴화되지 않은 채 남아있어 낮은 숨을 쉬고 있는 것을 상상하곤 한다.
끝의 끝, 막다른 끝, 거기서는 한 걸음도 떠나갈 수 없는,
한 걸음만 더 내디디면 바다에 빠지거나 허무의 공간으로 떨어지고 마는
그러한 최후의 점 같은 곳…. - 김동리, 『밀다원 시대』
한반도의 가장 끝에 위치해 동해와 남해를 접하고 있는 부산은 인천과 군산, 포항과 같은 다른 항구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역사의 전환기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그대로 맞고 있었다. 1892년 부산이 개항하면서 많은 일본인들이 부산으로 몰려들었다. 일본인의 수가 증가하는 만큼 그들이 죽은 후 그 시신을 묻고 장례를 치를 장소가 필요했다. 당시 매장을 선호했던 조선의 풍습과는 다르게 시신을 화장하여 묘지에 납골하는 장례 문화를 지녔던 일본인들은 곡정谷町(현재의 아미동)에 화장장과 공동묘지, 그리고 장례를 관리하는 총천사總泉寺라는 이름의 절을 지었다. 땅을 다지고 그 위로 축대를 쌓아 묘지를 구획했으며, 돌로 바닥과 계단, 그리고 비석을 만들었다. 1945년, 한국이 해방이 되면서 일본인들이 떠나자 그들의 공동묘지는 그대로 곡정에 버려지고 방치되었다. 그 후 한국전쟁이 발발하였고 수많은 피란민들이 부산으로 내려왔다. 정착할 곳을 찾던 피란민들은 항구와 멀지 않고 시장과는 인접해있던 아미동으로 모여 일본인들이 버리고 간 공동묘지에 위에 자신들이 거주할 공간을 만들기 시작했다. 집을 지을 마땅한 재료조차 구할 수 없었던 그들에게는 이미 구획되어 정리되어 있는 바닥과 그 주위를 둘러싸 경계를 만든 낮은 돌단은 임시로 거주할 공간을 짓기에 가장 적합한 장소가 되었다. 그들은 묘지 위에 천이나 짚을 매달아 지붕이 동시에 벽이 되는 텐트 형식의 집을 만들고, 비석과 상석을 드러내어 벽의 하단과 계단을 만들었다. 일본인들의 묘지에 사용되었던 돌들은 피란민들에게 집을 짓는 매우 중요한 건축 재료가 되었다. 묘지의 한 칸은 한 집이 되었고, 묘지와 묘지의 좁은 사이는 길이 되었다. 죽음을 상징했던 장소는 세상의 끝에서 살아남기 위한 이들의 새로운 삶의 시작점이 되었으며, 이 공존은 현재까지도 아미동에 그대로 남겨져 있다.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은 조선의 소를 일본으로 수탈하기 위해 부산 남구 우암동의 앞바다를 매립하고 그 주위로 소를 키우는 우사牛舍(소막사)를 지었다. 그리고 이곳을 멀리서 바라보면 산의 흙이 붉게 보인다 하여 붉을 적赤과 땅 이름 기崎를 써 적기, 아카사키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그들은 매립된 땅 위로 일본식 목조 트러스트 구조와 삼각형의 경사진 지붕을 지닌 19동의 거대한 소막사와 사료를 만드는 조리소, 검역소, 인부들의 숙소 등을 짓고 소를 일본으로 반출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막을 내리고 한국이 해방되면서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나라로 돌아가자, 마치 아미동의 일본인들의 묘지처럼, 그들이 우암동에 지어놓았던 소막사는 그곳에 그대로 남겨졌다. 한국전쟁 당시 한반도의 가장 끝으로 모여든 피란민들을 모두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이 없자, 임시정부는 우암동의 소막사로 피란민들을 보냈다. 피란민들은 소막사의 내부 목구조에 이불이나 천, 짚단, 가마니 등을 걸어 벽을 만들어 공간을 나누었다. 벽을 세우자 막사의 가운데로 자연스럽게 통로가 만들어졌고, 막사 한 동과 다른 동의 사이는 길이 되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웃과 벽을 공유하면서 그 속에서 다시 살아가기 시작했다. 산업화 시기로 들어서면서 이불과 짚으로 만들어졌던 벽은 곧 판자로 교체되었고 축사의 높은 층고는 다락으로 개조하여, 소막사의 내부 구조 안에서 여러 채의 집이 나누어 만들어졌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이 모습이 마치 하모니카의 모양과 같다고 하여, 이러한 형태를 가진 우암동의 집은 현재까지도 ‘하모니카 집’으로 불리고 있다. 나무로 지어졌던 소의 막사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집’의 형태로 변하게 되었는데, 일본식 박공지붕 위로 삐죽 솟아오른 막사의 환풍구만은 아직까지도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 우암동의 변화를 조용히 내려다보고 있다.